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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세신입회계사 Part 4. 수정분개

웹소설: 55세신입회계사

by 점쟁이회계사 2023. 9. 1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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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회의실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보통 첫 만나면 명함부터 교환하는데 이 아줌마는 쌍욕부터 던지기 직전이다. 나는 초면이니 나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겠지 라는 생각에 순식간에 팝콘 각이 되었다 싶었는데

"저희 회사가 학원이 아니거든요. 매번 새로 오신 뉴스텝 분 데리고 오셔서 저희가 가르쳐 드리는 데 아주 이만저만 번거로운 게 아니에요"

팝콘각이 아니었다. 주제가 바로 나였다

"저번에도 새로오신 분 오셔서 회사  설명 다 해드리고 심지어 내부통제 교육까지 시켜드렸어요. 아니 그런데 그분은 어디 가시고 또 새로운 분을 데리고 오시면 곤란하죠. 아무튼 이번에는 저번과 같은 일 없게 좀 잘 부탁드립니다"

말은 부탁이라 하지만 말 걸면 죽여버리겠다는 압박이 느껴진다. 아 이것이 글로벌 대형 외국계 법인의 힘인가. 결국 명함을 주지 않고 여자 팀장으로 보이는 아주머니는 회의실 문을 팅 열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회의실에 맴도는 아련한 정적....아 첫날부터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시련을 언급하는 순간 형이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린다. 

<<큭큭 아 저 아줌마 재미있네 ㅋㅋㅋㅋ 근원아 쫄지마 ~ 임마 형이 있잖아 >>

"아 형 어떡해 나~ 첫 클라이언트 부터 이상한 꼰대 만났어"

<<ㅋㅋㅋㅋ 걱정마 임마. 아 나도 저런 클라이언트 많이 만나고 한 번도 뭐라고 못했었는데 ~ 이번에 아주 제대로 파볼까? 본때를 보여주자고>>

메일로 회사 자료가 왔다. 재무상태표, 손익계산서, 계정명세서..... 오 어떤 건 중간감사 때 못 봤던 양식들이다.

<<자자 형이 강의하기 전에 ~ 일단 자료 제대로 왔는지 쓱 보여줘. 손 빠르지?>>

<<어어 거기 거기...ㅇㅋ 그다음 파일>>

형과 나는 회사에선 온 엑셀파일들을 빠른 속도로 하나씩 훑었다. 회사가 크고 나도 무려 수능 수학 1등급을 받은 고급인력이지만 차변과 대변의 숫자가 맞는지, 명세서와 합계액이 맞는지 같은 자잘한 것부터 시작해야만 한다고 했다.

"쌤 뭐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면서 해요"

선임 녀석은 내가 아무 말하지 않고 자료만 보니까 걱정돼서 한마디 던지는데 지금 너를 상대할 시간이 없다 

"아 네네"

짧게 답변하고 다음 파일을 넘기려는 순간 

<<잠깐 스톱! 이거 뭐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형이 큰 소리를 질렀다. 뭐지? 여긴 그냥 외화 자산부채 내용이 들어간 주석이고 복잡한 산식도 없는데

<<야야 너 이런 거 본 적 있니 ㅋㅋㅋ>>

형이 알려주는 곳을 보니 외화표시 통화에 USD, CNY...그리고 URO가 있었다. 

뭐지 URO라는 통화는 어디 나라 통화지? 형이 모르는 곳일 수도 있어서 구글에 빠르게 검색을 해봤다   

............uro는 urine에서 온 말로 소변이라는 뜻이고 logy는 학문 분야에 붙이는 접미어이다. 어원의 의미대로 번역하면 소변의학 혹은 오줌의학이 정확한 용어.............

 

<<야 맞네 맞아 그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웃겨 ㅋㅋㅋ EUR을 써야 하는데 소변을 지려놨네 이것들이 ㅋㅋㅋ>>

"아 ㅋㅋㅋㅋ 그렇게 ㅋㅋ 형 뭐 이 정도는 단순 오타 아냐? 이게 그렇게 심각한 거야?"

<<너 진짜 중요한 것을 아직 못 봤구나. 나머지는 형이 선물로 줄게.  뭐가 이상한 지 계속 봐바 >>

 

뭐야 뭐가 더 있어? 호기심이 아름다리 나무 마냥 부풀어 올랐다. 이것은 흡사 범인을 찾는 탐정놀이이자 방탈출 게임!!

 

"어 형 여기 이거 환율이...."

<<  빡대가리인줄 알았는데 제법인데 ~ 왠열~ 그래 거기 환율이 이상하지?>>

 

당연히 오늘자 혹은 연말일자 기준환율을 외우고 있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외화  유로 자산과 외화 유로 부채의 환율이 다르다는 것이다 

<<오케이 한 건 했어 ~ 이거 바로 인차지(해당 회사 감사 나온 회계사들 중 대장을 의미)한테 알려. 지금 모든 사람들이 이 재무제표를 보고 작업하고 있는데 미리 빨리 알려줘야 한다>>

"아아 고마워 형"

<<아아 스톱. 너 이 계정 담당자 알지? 신대리던가? 그 회사 사람에게 네가 직접 말해라. 이 회사 사람들은 너를 물로 보고 있으니까 네가 알리는 게 더 좋겠어. 자기 PR도 중요하다고>>

 

10분 뒤

 

회의실 문이 열리며 아까 그 팀장이 들어왔다. 처음에 그 높던 콧대의 각도가 약간 밑으로 꺾여있다. 허리도 마찬가지고. 회의실 탁자의 의자들을 설설 뒤로 돌아오더니 담당 인차지 선임에게 공손하게 말을 한다 

"저 회계사님..."

여기 와서 회계사님 소리 처음 들었다. 뭐 맞는 말이지 회계사인데 회계사님이라고 해야지 

"저희 재무제표를 다시 드려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실까요?"

인차지 선임이 놀래서 물어본다. 

"아... 네.... 지금 한창 작업하고 세팅 다 하긴 했지만 다시 하면 되죠.... 근데 왜죠? 무슨 일이죠??"

회계팀장이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자리가 멀어서 온전히 들리진 않았지만 설명 중간에 인차지 선임이 나를 보고 살짝 웃는 모습이 보였다 

"아 네네 그러시죠 그럼"

<<잘했어~ 원하던 바다. 첫 기말 감사 실적 잡은 것 축하해. 야야 인차지 쌤 입 찢어진다 ㅋㅋㅋ>>

"오... 잘한 거예요?"

<<당연하지 그럼 ~ 이제 신입이라고 함부로 못할걸? 아울러 너도 인차지 쌤한테 좀 점수 좀 땄을 거다. 저 자리에 있으면 위에 보고할 게 없으면 괴롭거든. 네가 하나 만들어 준거야>>

그 뒤론 정말 수월했다. 회사에선 자료도 잘 주고 내가 갈팡질팡 하고 있어도 보통 신입 회계사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무시하는 듯한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선임 말대로 계정 이슈도 별로 없는 회사라 뭐 크게 고민할 것도 없었고... 하지만 오히려 이슈가 없다는 점 때문에 랩업미팅(클라이언트 사무실에서 필드웍 끝날 때쯤 회사와 하는 미팅)에서 내가 발견한 주제가 메인이 되었다. 소변을 묻힌 점은 민망해서 주제가 되지 않았고(그 외국계 회사 신입의 잘못인 듯) 어떤 이슈가 있어서 환율이 잘못 기재되어 있는지, 시스템이나 내부통제는 문제가 없는지 등을 러프하게 다뤘다. 뭔가 발견한 기자, 탐정이 된 것 같아 괜히 으쓱해졌다     

저녁이 되었다. 예상하던 대로 회식자리에 끌려가긴 했지만 뭔가 하나 해내었다는 마음에 술이 맛있게 잘 들어간다

"오 김쌤 오늘 잘했어요 굿굿 베리 굿! 오 술도 잘 마시네"

인차지 쌤이 불금이라고 술을 권하는데 술을 잘 먹는다는 칭찬에 마음이 한번 더 녹아들어 갔다. 크으 이 맛에 감사하는구나라고 한잔 두 잔 먹으며 자아도취와 술에 빠져간다....

<<야야 너 너무 김칫국이다. ㅋㅋㅋㅋ 이거 기말감사이긴 한데 엄청 쉬운 거야. 너무 업되지 말라고. 기분 좋은 건 괜찮은데 좋은 거랑 업된 거랑은 정말 다르다고~>>

그렇다. 형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좋은 결과가 있었을까? 아마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먼저 발견하거나 내가 발견을 해도 마지막날에 발견해 쿠사리 먹었겠지?

"형 땡큐야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 내가 술이라도 한잔 사주고 싶은데 아쉽네 "

<<얌마 너 나랑 전두엽부터 후두엽부터 같이 쉐어하는 중이야. 나도 지금 취한다. 임마 그만 마셔 ㅎㅎ>>

그렇게 나의 12월은 아름답게 칠해졌다.

술을 한잔하고 밖을 나와보니 날씨는 어제보다 더 추워졌다.

이미 여러번의 겨울을 나신 선임들은 시즌이 두렵다는데 ....도대체 시즌엔 어떤 일이 벌어지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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